플라톤의 초기 대화들은 특히 윤리와 선한 인간이 되는 것과 덕의 정의에 관한 것으로, 여기서는 소크라테스의 견해에 대해 정당한 평가를 내리고 있기는 하지만 매우 미화시키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반면 지식과 우주론적 문제들에 더욱 많이 관련있는 후기의 대화들은 플라톤의 사상임이 거의 확실하다. (p. 108)
공부를 할 때, '세상의 모든 철학'과 같은 개괄서는 위처럼 한 학자의 흐름에 대해 그나마 '일반적인' 서술로서 표현하려고 한다. 그래서 개괄서에만 묻혀 있으면 안된다. 초기 대화들의 어떤 부분들이 어떤 표현과 어떤 구조를 통해 위와 같은 표현을 만들어낼 수 있는지에 대해 의문을 가져야 한다. 이게 '개괄서'의 의미가 아닐까?
플라톤 철학의 중심사상은 형상론이었다. 이 이론은 '두 개의 세계'를 상정하는 우주론을 제기하였다. 하나의 세계는 변화하고 비항구적인 우리의 일상세계이며, 다른 하나의 세계는 이상적인 '형상' 혹은 에이도스가 살고 있는 이데아의 세계이다. (p. 108)
플라톤은 이 세계가 상호 연관되어 있다고 보았다. 우리가 살고 있는 생성의 세계는 존재의 세계, 즉 이상적인 형상의 세계에 의해 규정된다고 말했다. (108P) 이상적인 형상의 세계가 우리가 살고 있는 생성의 세계에 관여하는 것이다. 로고스라고 하는 것은 일상세계를 지탱하고 있고, 변하지 않는다. 로고스는 끊임없이 변하는 일상세계를 규정한다. 그렇기에 이성을 통해서 '형상의 세계'를 적어도 어렴풋이 알아 볼 수 있다고 말했다. 그 예는 수학과 기하학의 분야들이다. 이러한 이야기는 피타고라스와 관련이 있다. 피타고라스는 수학과 기하학의 연구를 통해 세계의 일상적인 흐름을 꿰 뚫어 볼 수 있고, 불변하는 본질적인 것을 알 수 있다(정리하는 내 설명은 꽤나 뭉뚱그려져 있다). 동굴의 비유를 생각해보자.
플라톤은 이 세계가 상호 연관되어 있다고 보았다. 우리가 살고 있는 생성의 세계는 존재의 세계, 즉 이상적인 형상의 세계에 의해 규정된다고 말했다. (108P) 이상적인 형상의 세계가 우리가 살고 있는 생성의 세계에 관여하는 것이다. 로고스라고 하는 것은 일상세계를 지탱하고 있고, 변하지 않는다. 로고스는 끊임없이 변하는 일상세계를 규정한다. 그렇기에 이성을 통해서 '형상의 세계'를 적어도 어렴풋이 알아 볼 수 있다고 말했다. 그 예는 수학과 기하학의 분야들이다. 이러한 이야기는 피타고라스와 관련이 있다. 피타고라스는 수학과 기하학의 연구를 통해 세계의 일상적인 흐름을 꿰 뚫어 볼 수 있고, 불변하는 본질적인 것을 알 수 있다(P109, 정리하는 내 설명은 꽤나 뭉뚱그려져 있다). 동굴의 비유를 생각해보자.
동굴의 비유는 동굴 속에서 족쇄에 채워진 채 동굴의 벽을 바라보고 있는 죄수들의 이미지로부터 시작한다. 그들이 바라보면서 실재라고 여기는 것은 벽 위에 그친 그림자일 뿐이다. (중략) 그것은 실재의 그림자이지만, 그것보다 훨씬 더 실재적인 거의 그림자이다. (중략) 좀더 실재적이고 좀 덜 실재적인 것 사이의 구분, 상위 세계와 하위 세계의 구분이 있을 뿐이다. 이제 죄수들 중의 한 사람인 철학자가 족쇄를 끊고 고개를 돌려 처음으로 동굴의 벽에 그림자를 던지는 진정한 사물과 그림자를 드리우게 만드는 태양을 보게 되었다고 하자. 그는 이 눈부심에 현혹되지 않을까? 그는 곧바로 자신이 지금 보고 있는 실재와 비교하여 일상의 실재의 그림자들이 얼마나 불완전한가를 알아보지 않을까? 또한 언제나 불완전하고 혼동된 관념들과 일상적인 남녀의 행동에 비해 완전한 형상을 가진 덕과 정의, 그리고 용기를 보면서 철학자는 눈이 부실 것이다. 그 때 그의 열망은 얼마나 '더 높아'질 것인가. 그리고 만일 철학자가 다시 동굴로 돌아가 동료들에게 그들의 세계가 얼마나 초라하며, 또 그들이 이상적으로 여기는 것들이 얼마나 부적절한 것들인가를 설명해주려 하면, 그들은 오히려 그를 죽이려 들지 않을까? 이 비유가 소크라테스의 운명을 언급한 것임에 틀림없지만, 형상에 관한 암시는 더욱 보편적이고 심오한 의미를 갖는다. (p. 110-111)
플라톤의 <국가>는 묘하게도 권위적이고 위계적이며 평등주의적인 특징을 차례로 갖고 있다. 그것은 타고난 재능과 교육에 기초한 '자연적인' 귀족정치이다. 그리고 온건한 독재체제로서, 여기서는 '나라를 지키는 사람들'을 포함하여 누구든지 각자 본분을 알고 있다. 그것은 개인과 개인의 이익을 충족시키는 사회가 아니라 오히려 개인과 개인의 이익을 공통의 선에 종속시키는 사회이다. (중략) 좋은 사회에 관한 이와 같은 비민주적인 전망과, 선량하지만 괴벽스러운 '쇠파리'인 소크라테스의 거의 성자 같은 이미지를 조화시키기는 어려운 일이다. (중략) 우리는 마땅히 국가의 권위적이고 불평등적인 측면을 거부해야겠지만, 국가의 세계관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또한 절대적인 이데아라는 또 다른 세계를 믿는 극단적인 형이상학을 거부해야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상적인 덕의 추구와 얼마간 철학을 통해 덕을 기르는 중요성을 흘려버려서는 안 된다. (p. 112)
앞서 언급했듯이, 호메로스에서부터 데모크리토스까지 그리스인들은 최소한의 범위 내에서 영혼을 '믿었다'. 그들은 '숨'이라 불리는 것이 신체를 움직이게 하는 데 필요하며, 죽음과 더불어 신체를 떠난다고 보았다. 하지만 이에 따르면, 신체가 영혼을 필요로 하는 만큼 영혼도 신체를 필요로 한다. 영혼이 없이는 신체도 죽은 것이며, 신체가 없이는 영혼도 아무런 의미나 가치도 없는 비참한 그림자에 불과하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영혼이 도덕적인 중요성을 지녔다고 보았다. 또한 영혼은 신체보다 더욱 중요했다. 소크라테스는 영혼이 어떤 중요한 의미에서 신체보다 더 오래 산다고 믿었다. (p. 113)
영혼은 우리의 다른 부분과 달리, (부분적으로) 영원한 세계인 존재의 세계에 속해 있다. 그러므로 영혼이 신체를 잃는 것은 부분적인 유실일 뿐이다. (혹은 보는 관점에 따라서는 전혀 잃은 것이 없다.) (중략) 영혼이 (부분적으로) 존재의 세계에 속한다면, 그것은 이미 형상에 대한 지식을 포함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덕, 아름다움, 선에 관한 우리의 지식은 배움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며 또한 가르칠 수도 없다. 우리는 이러한 지식을 가지고 태어난다. 그것은 '생래적'이다. (말 그대로, 우리 '안에 타고 났다'.) 소크라테스는 '파이돈'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어떤 것을 절대적으로 알기 위해서는, 우리는 마땅히 우리의 신체로부터 자유로워야 하며 영혼의 눈만으로 현실의 실재를 보아야 한다." 이리하여 영혼은 지적이고도 도덕적인 삶을 위한 견인차가 된다. 문자 그대로 말하자면, 영혼은 우리 인생에서 걱정해해야 할 진정한 가치를 지니는 것이다. (p. 113-114)
소크라테스는 '향연'에서 사랑이란 단지 아름다운 신체나 혹은 아름다운 사람에 대한 욕구만은 아니며, 아름다움 자체에 대한 사랑이라고 주장하였다. 물론 '아름다움 자체'는 형상의 하나이다. 그리고 그것이 진실하게 사랑하는 사람을 지식을 사랑하는 사람(즉 철학자)로 만든다고 하였다. (p. 114)
향연에서 아리스토파네스는 '원래는 둘이 합쳐져 있던 인간이 제우스에 의해 오늘날과 같은 모습으로 반으로 나누어졌다는 옛 이야기를 한다. 그 이후로 인간은 '자신의 반쪽을 찾으려는 노력'을 하게 되었고 이것이 바로 사랑이라는 이야기를 한다. (p.115)
대화의 끝 자락에서 알키비아데스가 난입하여 소크라테스를 조롱한다. 그리고 소크라테스를 남의 마음을 괴롭히는 사람이라고 매도한다. 하지만 알키비아데스 역시도 소크라테스의 가르침과 곧바로 모순되는 한 가지 지점을 보여준다. 그는 자신의 행동을 통해 (주장하지는 않았지만) 사랑이란 형상이 아니라 매우 구체적인 개인을 지향하며, 더 나아가 아름다움과 개인의 미덕은 사랑과는 아무런 특별한 연관도 없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추남이지만 덕이 있다고 여겨지는 소크라테스, 미남이지만 도덕적으로 악명 높은 알키비아데스의 대비) 에로스에 대한 플라톤의 견해는 소크라테스가 말한 이상적인 특징들을 예시하는 것이었던 것 같다. 허나 이 또한 소크라테스가 무시한 형이상학적이고 신화적이며 강박적인 성격을 지닌다. (p.115)
사랑에 대해 / 에로스로의 사랑, 필리아로의 사랑 / 이 둘을 바라보기 위해 '향연'과 '뤼시스'를 대비하여, 또 연계하여가며 바라보는 것도 필요하다.
아름다움과 질서에 대한 미학적 관심은 플라톤 철학 전체를 이해하는 핵심이다. 아름다움이란 육체를 가진 인간이 가장 용이하게 인식할 수 있는 형상이다. 그리고 아름다움을 일별하는 것은 종종 사람들로 하여금 철학을 추구하게 만드는 최초의 동기가 되곤 하였다. 더욱이 플라톤에게 덕은 아름다움과 유사하다. 덕은 영혼을 조화롭게 만들며, 마찬가지로 아름다움은 얼굴이나 어떤 장면의 요소들을 질서 지운다. 플라톤의 이상적인 국가조차 각 부분들이 조화롭게 구서오디어 있다는 미학적 관념을 내포하고 있다. (p. 114)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서도 윤리적 정치적 이상들을 공식화하는 데서 계속해서 미적 개념들이 중심을 이루며, 이러한 양상은 이후의 철학에서도 다양한 관점으로 다시 나타난다. (p.114)
동굴의 비유는 동굴 속에서 족쇄에 채워진 채 동굴의 벽을 바라보고 있는 죄수들의 이미지로부터 시작한다. 그들이 바라보면서 실재라고 여기는 것은 벽 위에 그친 그림자일 뿐이다. (중략) 그것은 실재의 그림자이지만, 그것보다 훨씬 더 실재적인 거의 그림자이다. (중략) 좀더 실재적이고 좀 덜 실재적인 것 사이의 구분, 상위 세계와 하위 세계의 구분이 있을 뿐이다. 이제 죄수들 중의 한 사람인 철학자가 족쇄를 끊고 고개를 돌려 처음으로 동굴의 벽에 그림자를 던지는 진정한 사물과 그림자를 드리우게 만드는 태양을 보게 되었다고 하자. 그는 이 눈부심에 현혹되지 않을까? 그는 곧바로 자신이 지금 보고 있는 실재와 비교하여 일상의 실재의 그림자들이 얼마나 불완전한가를 알아보지 않을까? 또한 언제나 불완전하고 혼동된 관념들과 일상적인 남녀의 행동에 비해 완전한 형상을 가진 덕과 정의, 그리고 용기를 보면서 철학자는 눈이 부실 것이다. 그 때 그의 열망은 얼마나 '더 높아'질 것인가. 그리고 만일 철학자가 다시 동굴로 돌아가 동료들에게 그들의 세계가 얼마나 초라하며, 또 그들이 이상적으로 여기는 것들이 얼마나 부적절한 것들인가를 설명해주려 하면, 그들은 오히려 그를 죽이려 들지 않을까? 이 비유가 소크라테스의 운명을 언급한 것임에 틀림없지만, 형상에 관한 암시는 더욱 보편적이고 심오한 의미를 갖는다. (p. 110-111)
플라톤의 <국가>는 묘하게도 권위적이고 위계적이며 평등주의적인 특징을 차례로 갖고 있다. 그것은 타고난 재능과 교육에 기초한 '자연적인' 귀족정치이다. 그리고 온건한 독재체제로서, 여기서는 '나라를 지키는 사람들'을 포함하여 누구든지 각자 본분을 알고 있다. 그것은 개인과 개인의 이익을 충족시키는 사회가 아니라 오히려 개인과 개인의 이익을 공통의 선에 종속시키는 사회이다. (중략) 좋은 사회에 관한 이와 같은 비민주적인 전망과, 선량하지만 괴벽스러운 '쇠파리'인 소크라테스의 거의 성자 같은 이미지를 조화시키기는 어려운 일이다. (중략) 우리는 마땅히 국가의 권위적이고 불평등적인 측면을 거부해야겠지만, 국가의 세계관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또한 절대적인 이데아라는 또 다른 세계를 믿는 극단적인 형이상학을 거부해야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상적인 덕의 추구와 얼마간 철학을 통해 덕을 기르는 중요성을 흘려버려서는 안 된다. (p. 1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