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2월 27일 토요일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머리말' 전문


2005년 3월 18일 ... 루이스 캐럴에 관한 세계 최고의 연구가 중 한 사람인 마틴 가드너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와 <거울 나라의 앨리스>에 교묘하게 감추어져 있던 ...




머리말

 

황금빛 햇살 가득한 오후

우리는 한가로이 물 위를 미끄러지듯 흘러가네.

작은 두 팔은 노를 젓고,

작은 두 손은 헛손질을 하며

한가한 우리 여행을 이끄네.

 

아, 짖궂은 세 아이여! 이런 시간,

이렇게 꿈같은 날에,

그날의 가장 작은 깃털조차 흔들지 못할 정도로

약한 숨결 같은 이야기를 해달라 조르다니!

하지만 가여운 이야기꾼이

어찌 이야기를 조르는 세 아이 요구를 물리칠 수 있으리.

 

마음이 급한 첫째는 상기되어

<빨리해요!>라 명령하고

둘째는 기대에 차서 좀 더 부드러운 목소리로

<터무니없는 이야기는 안 돼요!>라 바라고

셋째는 잠시도 기다리지 못하고

조바심치며 이야기를 가로막누나.

 

이윽고, 돌연 정적이 흐르고

세 아이는 상상 속에서

기상천외하고 새로운 마법의 땅을 여행하며

새와 짐승과 정답게 이야기하는

꿈의 아이를 쫓아다니고

그게 정말이라 믿누나.

 

그리고 결국, 이야기 밑천이 바닥나고

지친 이야기꾼이 힘없이

<나머지는 다음에>라며 머뭇거리면

아이들은 <지금이 다음이에요>라며

행복하게 외치누나.

 

그리하여 이상한 나라의 이야기는 늘어나노라.

그렇게 천천히, 하나 그리고 또 하나씩.

신기한 사건들이 펼쳐지고

이제 이야기는 끝이 나노니,

즐거운 우리는 저무는 해를 뒤로하고

집으로 노를 저어 돌아가노라.

 

앨리스! 이 순진한 이야기를

그 부드러운 손으로 받아

어린 시절의 꿈으로 엮은

추억의 신비한 띠에 수놓아 주렴.

 

아주 먼 나라에서 만든,

시들어 버린 순례자의 꽃다발처럼.

 

(p.9-11)

 


루이스 캐럴 지음, 머빈 피크 그림, 최용준 옮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열린책들, 2007

2010년 1월 16일 토요일

서론 Introduction

p.17
     바울과 마피아 보이가 성공한 것은 우리가 모두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중략) "모든 것은 모든 것에 잇닿아 있다."

 사도 바울과 야후를 무력화 시킨 '마피아 보이'로 불리우는 10대 소년에 대한 예를 들었다. '사도 바울은 첫 번째 세기에 당시의 신앙을 실어 나르고 전파할 수 있는 유일한 네트워크였던 사회적 종교적 링크의 마스터'였으며, 마피아 보이는 2000년 2월에 검색엔진을 무력화 시킨 일의 주인공이며 현대 사회가 어떻게 이어져있는지를 보여 준 '마스터'였다. 역사가 지나며, 네트워크의 모습은 변화해왔다. "사회적 종교적 링크"에서 "인터넷을 통한 네트워크"로의 변화해오며, 모두가 속한 이 네트워크의 구조가 변화해왔다. 그렇지만 네트워크가, 즉 우리가 모두 연결되어 있다는 것은 변하지 않았다. 그 양과 방법이 변한 셈이다. 이를 바라바시는 "네트워크의 구조"와 "위상"이라고 표현한다.

p.18
     놀랄 만큼 단순하면서도 적용 범위가 넓은 자연 법칙들이 우리 주변의 모든 복잡한 네트워크들의 구조와 진화를 지배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었다.

 우리는 수 많은 지도를 만든다. 애초에 지도라 불리우는 세상의 거리와 높이, 모습을 담는 지형학적 지도에서부터 현대에 시도된 인간의 생물학적 지도까지, 이를 넘어 이제 사람과 사람 사이의 지도를, 또 사람과 경제, 눈에 보이지 않는 인터넷의 구조에 대한 지도까지, 이제는 '상호연결성'이 지도의 핵심이 되었다. "이러한 여러 가지 지도들을 모두 나란히 놓았을 때" "공통의 청사진에 다르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고 바라바시는 말한다. 그리고 위에 적은 것과 같이, '자연 법칙'들이 이 모든 네트워크의 구조와 진화를 지배하고 있다고 바라바시는 언급한다.

p.19
     우리는 세계를 분해해 놓고, 그것을 어떻게 결합해야 할지 모르고 있는 것이다. 환원주의는 20세기의 과학적 연구를 배후에서 이끌어간 주된 원동력이다. (중략) 부분들을 이해하게 되면 전체를 이해하기 훨씬 쉬워질 것이라는 가정이 깔려 있다.

     재조립은 과학자들이 당초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어려운 작업이었던 것이다. 그 이유는 단순하다. 환원주의를 따를 때, 우리는 복잡성complexity이라는 견고한 벽에 맞닥뜨리게 된다.자연은 다시 재조립하는 방법이 오직 하나뿐인 잘 설계된 퍼즐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복잡한 시스템complex system에서는 구성요소들이 서로 결합하는 방식이 너무도 많아서, 그것들을 모두 시험해 보는 데에는 수십억 년이 걸리게 될 것이다. 하지만 자연은 지난 수백만년 동안 조각들을 우아하고 정교하게 결합해왔다.

 근대의 학문들은 대개가 좁고 깊게 탐구한다. 좁고 깊게 탐구하기 위해, 큰 주제를 잡고, 작은 주제로 하나 하나 좁혀 들어간다. 그리고 세상을 보는 일정한 눈을 지닌다. 일종의 렌즈를 끼는 셈이다. 그렇지만 이 렌즈는 세상 전부를 설명하지 못 한다. 애초에 세상의 전부를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을 가정한 것이기에, 그러한 시도를 하지 않는다. 어찌보면 이러한 세분화를 통한 탐구라는 것은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을 가정한 것이 아니라, 인정한 그 결과일테다. 하지만 '네트워크'로 이루어져있다는 바라바시의 지적은 이러한 탐구에 반대되는 셈이다. 네트워크의 변화, 변화를 통해 바뀌어 온 인간의 삶, 너무나 폭 넓은 범주이긴 하지만, '네트워크', 즉 상호 연결성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일테다.

p.20
     대부분의 사건이나 현상은 복잡한 세계complex universe라는 퍼즐의 엄청나게 많은 다른 조각들과 연결되어 있으며, 그것들에 의해 생겨나고 또 상호작용한다. (중략) 우리는 비로소 네트워크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되었다.

 앞에서 말한 '상호 연결성', 이는 복잡한 세계를 이해하는 하나의 열쇠다.

     인터넷이 우리의 생활을 지배하게 되면서 누구나 '네트워크'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게 되었고, (중략) 9.11사태 이 후, 테러리스트 네트워크의 치명적인 힘을 지켜보면서, 우리는 네트워크의 또 다른 의미에 익숙해지게 되었다.

 네트워크는 어떤 것이다 라는 세부적인 정의는 필요치 않다. 인터넷을 통해 널리 알려졌을 때, 네트워크는 긍.정적이었다. 반면에 9.11 사태 이후, '테러리스트 네트워크'라는 말의 네트워크는 부정적이다. (긍정적과 부정적을 나눈 준거는 사람과 사람이 공존할 수 있는 가능성의 '파괴'에 두겠다) 이 다음, 바라바시는 네트워크에 대한 연구가 일부 과학자들에 의해서만 이루어진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 과학자들의 발견들은 '새로운 빛을 던져주고 있다'고 말한다. 애초에 네트워크에 대한, 우리 말로 바꾼다면 '사이 사이'에 대한 연구는 빛을 발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p.21
     대부분의 사람들이 인식하는 것보다 훨신 강력하게 네트워크가 새로운 세기를 지배하게 될 것

     이 책에서는 네트워크들은 어떻게 생겨나며, 어떤 모양으로 생겨 있고, 어떻게 진화하는가를 다룬다. 이 책은 자연, 사회, 그리고 비즈니스에 대한 그물망적(Web-based) 시각을 제시할 것이며, 이것은 웹Web 상에서 일어나는 민주주의 법칙에서부터 인터넷의 취약성이나 바이러스의 치명적 전파에까지 이르는 다양한 이슈들을 이해할 수 있는 새로운 준거틀을 제공해줄 것이다.

     네트워크는 어디에나 존재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단지 그것을 제대로 볼 수 있는 눈이다.


(정리) 다소 발췌한 문장 아래 적은 글글이 빙빙 돌고 있다. '네트워크의 마스터'의 예를 들며, 네트워크가 존재한다는, 그리고 변해왔다는 이야기를 한다. 우리는 네트워크를 이루며, 만들며 살아간다. 그리고 이런 네트워크의 구조는 자연 법칙에 따른다. 복잡하지만, 인간과 다르게 재조합에 능한 자연에 의해서 말이다. 반면에 인간은 세상을 이해하겠다고 온갖 것을 세세하게 나누지만, 자연과 다르게 재조합에 어려움을 갖는다. 이런 시기에 우리는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네트워크'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이 네트워크는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온라인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며, 긍정과 부정의 모습을 모두 갖고 있기도 하다. 이 책의 목적은 네트워크의 생성, 모습, 진화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리고 자연과 사회, 경제 영역에 대한 그물망적 시각을 포함한다. 또한 민주주의 법칙과 같은 사회적인, 인터넷의 취약성과 같은 기술적인, 하지만 인간 능력의 한계, 또한 이 온라인 네트워크를 마비시키고자 하는 바이러스 유포에 대한 이야기들을 바라 볼 준거틀을 제시하고자 한다.

(궁금증) 과학적인 방법론은 대개가 일반법칙으로 환원시키고자 작동하지 않나라는 질문이 생긴다. 환원주의에 대한 비판을 가하지만, 그가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건 다시 과학자들의 발견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도 다시 볼 필요가 있다.

책 소개> 링크: 21세기를 지배하는 네트워크 과학

지은 책으로 <지식의 통섭 - 학문의 경계를 넘다>(공저)가 있고, 옮긴 책으로 <링크 - 21세기를 지배하는 네트워크 과학>이 있다. 링크 : ...


링크: 21세기를 지배하는 네트워크 과학
(Linked: The New Science of Networks)
ISBN: 9788988165232
지은이: A.L. 바라바시 (Albert-Laszlo Barabasi)

목차

서론 Introduction
무작위의 세계 The Random Universe
여섯 단계의 분리 Six Degrees of Separation
좁은 세상 Small Worlds
허브와 커넥터 Hubs And connectors
80/20법칙 The 80/20 Rule
부익빈 빈익빈 Rich Get Richer
아인슈타인의 유산 Einstein's Legacy
아킬레스건 Achilles' Heel
바이러스와 유행 Viruses And Fads
인터넷의 등장 The Awakening Internet
웹의 분화 현상 The Fragmented Web
생명의 지도 The Map of Life
네트워크 경제 Network Economy
거미 없는 거미줄 Web Without a Spider
notes
감사의 글
역자 후기

2010년 1월 12일 화요일

플라톤

플라톤의 초기 대화들은 특히 윤리와 선한 인간이 되는 것과 덕의 정의에 관한 것으로, 여기서는 소크라테스의 견해에 대해 정당한 평가를 내리고 있기는 하지만 매우 미화시키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반면 지식과 우주론적 문제들에 더욱 많이 관련있는 후기의 대화들은 플라톤의 사상임이 거의 확실하다. (p. 108)


공부를 할 때, '세상의 모든 철학'과 같은 개괄서는 위처럼 한 학자의 흐름에 대해 그나마 '일반적인' 서술로서 표현하려고 한다. 그래서 개괄서에만 묻혀 있으면 안된다. 초기 대화들의 어떤 부분들이 어떤 표현과 어떤 구조를 통해 위와 같은 표현을 만들어낼 수 있는지에 대해 의문을 가져야 한다. 이게 '개괄서'의 의미가 아닐까?


플라톤 철학의 중심사상은 형상론이었다. 이 이론은 '두 개의 세계'를 상정하는 우주론을 제기하였다. 하나의 세계는 변화하고 비항구적인 우리의 일상세계이며, 다른 하나의 세계는 이상적인 '형상' 혹은 에이도스가 살고 있는 이데아의 세계이다. (p. 108)


 플라톤은 이 세계가 상호 연관되어 있다고 보았다. 우리가 살고 있는 생성의 세계는 존재의 세계, 즉 이상적인 형상의 세계에 의해 규정된다고 말했다. (108P) 이상적인 형상의 세계가 우리가 살고 있는 생성의 세계에 관여하는 것이다. 로고스라고 하는 것은 일상세계를 지탱하고 있고, 변하지 않는다. 로고스는 끊임없이 변하는 일상세계를 규정한다. 그렇기에 이성을 통해서 '형상의 세계'를 적어도 어렴풋이 알아 볼 수 있다고 말했다. 그 예는 수학과 기하학의 분야들이다. 이러한 이야기는 피타고라스와 관련이 있다. 피타고라스는 수학과 기하학의 연구를 통해 세계의 일상적인 흐름을 꿰 뚫어 볼 수 있고, 불변하는 본질적인 것을 알 수 있다(정리하는 내 설명은 꽤나 뭉뚱그려져 있다). 동굴의 비유를 생각해보자.


 플라톤은 이 세계가 상호 연관되어 있다고 보았다. 우리가 살고 있는 생성의 세계는 존재의 세계, 즉 이상적인 형상의 세계에 의해 규정된다고 말했다. (108P) 이상적인 형상의 세계가 우리가 살고 있는 생성의 세계에 관여하는 것이다. 로고스라고 하는 것은 일상세계를 지탱하고 있고, 변하지 않는다. 로고스는 끊임없이 변하는 일상세계를 규정한다. 그렇기에 이성을 통해서 '형상의 세계'를 적어도 어렴풋이 알아 볼 수 있다고 말했다. 그 예는 수학과 기하학의 분야들이다. 이러한 이야기는 피타고라스와 관련이 있다. 피타고라스는 수학과 기하학의 연구를 통해 세계의 일상적인 흐름을 꿰 뚫어 볼 수 있고, 불변하는 본질적인 것을 알 수 있다(P109, 정리하는 내 설명은 꽤나 뭉뚱그려져 있다). 동굴의 비유를 생각해보자.



동굴의 비유는 동굴 속에서 족쇄에 채워진 채 동굴의 벽을 바라보고 있는 죄수들의 이미지로부터 시작한다. 그들이 바라보면서 실재라고 여기는 것은 벽 위에 그친 그림자일 뿐이다. (중략) 그것은 실재의 그림자이지만, 그것보다 훨씬 더 실재적인 거의 그림자이다. (중략) 좀더 실재적이고 좀 덜 실재적인 것 사이의 구분, 상위 세계와 하위 세계의 구분이 있을 뿐이다. 이제 죄수들 중의 한 사람인 철학자가 족쇄를 끊고 고개를 돌려 처음으로 동굴의 벽에 그림자를 던지는 진정한 사물과 그림자를 드리우게 만드는 태양을 보게 되었다고 하자. 그는 이 눈부심에 현혹되지 않을까? 그는 곧바로 자신이 지금 보고 있는 실재와 비교하여 일상의 실재의 그림자들이 얼마나 불완전한가를 알아보지 않을까? 또한 언제나 불완전하고 혼동된 관념들과 일상적인 남녀의 행동에 비해 완전한 형상을 가진 덕과 정의, 그리고 용기를 보면서 철학자는 눈이 부실 것이다. 그 때 그의 열망은 얼마나 '더 높아'질 것인가. 그리고 만일 철학자가 다시 동굴로 돌아가 동료들에게 그들의 세계가 얼마나 초라하며, 또 그들이 이상적으로 여기는 것들이 얼마나 부적절한 것들인가를 설명해주려 하면, 그들은 오히려 그를 죽이려 들지 않을까? 이 비유가 소크라테스의 운명을 언급한 것임에 틀림없지만, 형상에 관한 암시는 더욱 보편적이고 심오한 의미를 갖는다. (p. 110-111)


플라톤의 <국가>는 묘하게도 권위적이고 위계적이며 평등주의적인 특징을 차례로 갖고 있다. 그것은 타고난 재능과 교육에 기초한 '자연적인' 귀족정치이다. 그리고 온건한 독재체제로서, 여기서는 '나라를 지키는 사람들'을 포함하여 누구든지 각자 본분을 알고 있다. 그것은 개인과 개인의 이익을 충족시키는 사회가 아니라 오히려 개인과 개인의 이익을 공통의 선에 종속시키는 사회이다. (중략) 좋은 사회에 관한 이와 같은 비민주적인 전망과, 선량하지만 괴벽스러운 '쇠파리'인 소크라테스의 거의 성자 같은 이미지를 조화시키기는 어려운 일이다. (중략) 우리는 마땅히 국가의 권위적이고 불평등적인 측면을 거부해야겠지만, 국가의 세계관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또한 절대적인 이데아라는 또 다른 세계를 믿는 극단적인 형이상학을 거부해야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상적인 덕의 추구와 얼마간 철학을 통해 덕을 기르는 중요성을 흘려버려서는 안 된다. (p. 112)


앞서 언급했듯이, 호메로스에서부터 데모크리토스까지 그리스인들은 최소한의 범위 내에서 영혼을 '믿었다'. 그들은 '숨'이라 불리는 것이 신체를 움직이게 하는 데 필요하며, 죽음과 더불어 신체를 떠난다고 보았다. 하지만 이에 따르면, 신체가 영혼을 필요로 하는 만큼 영혼도 신체를 필요로 한다. 영혼이 없이는 신체도 죽은 것이며, 신체가 없이는 영혼도 아무런 의미나 가치도 없는 비참한 그림자에 불과하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영혼이 도덕적인 중요성을 지녔다고 보았다. 또한 영혼은 신체보다 더욱 중요했다. 소크라테스는 영혼이 어떤 중요한 의미에서 신체보다 더 오래 산다고 믿었다. (p. 113)


영혼은 우리의 다른 부분과 달리, (부분적으로) 영원한 세계인 존재의 세계에 속해 있다. 그러므로 영혼이 신체를 잃는 것은 부분적인 유실일 뿐이다. (혹은 보는 관점에 따라서는 전혀 잃은 것이 없다.) (중략) 영혼이 (부분적으로) 존재의 세계에 속한다면, 그것은 이미 형상에 대한 지식을 포함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덕, 아름다움, 선에 관한 우리의 지식은 배움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며 또한 가르칠 수도 없다. 우리는 이러한 지식을 가지고 태어난다. 그것은 '생래적'이다. (말 그대로, 우리 '안에 타고 났다'.) 소크라테스는 '파이돈'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어떤 것을 절대적으로 알기 위해서는, 우리는 마땅히 우리의 신체로부터 자유로워야 하며 영혼의 눈만으로 현실의 실재를 보아야 한다." 이리하여 영혼은 지적이고도 도덕적인 삶을 위한 견인차가 된다. 문자 그대로 말하자면, 영혼은 우리 인생에서 걱정해해야 할 진정한 가치를 지니는 것이다. (p. 113-114)


소크라테스는 '향연'에서 사랑이란 단지 아름다운 신체나 혹은 아름다운 사람에 대한 욕구만은 아니며, 아름다움 자체에 대한 사랑이라고 주장하였다. 물론 '아름다움 자체'는 형상의 하나이다. 그리고 그것이 진실하게 사랑하는 사람을 지식을 사랑하는 사람(즉 철학자)로 만든다고 하였다. (p. 114)


 향연에서 아리스토파네스는 '원래는 둘이 합쳐져 있던 인간이 제우스에 의해 오늘날과 같은 모습으로 반으로 나누어졌다는 옛 이야기를 한다. 그 이후로 인간은 '자신의 반쪽을 찾으려는 노력'을 하게 되었고 이것이 바로 사랑이라는 이야기를 한다. (p.115)


대화의 끝 자락에서 알키비아데스가 난입하여 소크라테스를 조롱한다. 그리고 소크라테스를 남의 마음을 괴롭히는 사람이라고 매도한다. 하지만 알키비아데스 역시도 소크라테스의 가르침과 곧바로 모순되는 한 가지 지점을 보여준다. 그는 자신의 행동을 통해 (주장하지는 않았지만) 사랑이란 형상이 아니라 매우 구체적인 개인을 지향하며, 더 나아가 아름다움과 개인의 미덕은 사랑과는 아무런 특별한 연관도 없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추남이지만 덕이 있다고 여겨지는 소크라테스, 미남이지만 도덕적으로 악명 높은 알키비아데스의 대비) 에로스에 대한 플라톤의 견해는 소크라테스가 말한 이상적인 특징들을 예시하는 것이었던 것 같다. 허나 이 또한 소크라테스가 무시한 형이상학적이고 신화적이며 강박적인 성격을 지닌다. (p.115)


사랑에 대해 / 에로스로의 사랑, 필리아로의 사랑 / 이 둘을 바라보기 위해 '향연'과 '뤼시스'를 대비하여, 또 연계하여가며 바라보는 것도 필요하다.


아름다움과 질서에 대한 미학적 관심은 플라톤 철학 전체를 이해하는 핵심이다. 아름다움이란 육체를 가진 인간이 가장 용이하게 인식할 수 있는 형상이다. 그리고 아름다움을 일별하는 것은 종종 사람들로 하여금 철학을 추구하게 만드는 최초의 동기가 되곤 하였다. 더욱이 플라톤에게 덕은 아름다움과 유사하다. 덕은 영혼을 조화롭게 만들며, 마찬가지로 아름다움은 얼굴이나 어떤 장면의 요소들을 질서 지운다. 플라톤의 이상적인 국가조차 각 부분들이 조화롭게 구서오디어 있다는 미학적 관념을 내포하고 있다. (p. 114)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서도 윤리적 정치적 이상들을 공식화하는 데서 계속해서 미적 개념들이 중심을 이루며, 이러한 양상은 이후의 철학에서도 다양한 관점으로 다시 나타난다. (p.114)


동굴의 비유는 동굴 속에서 족쇄에 채워진 채 동굴의 벽을 바라보고 있는 죄수들의 이미지로부터 시작한다. 그들이 바라보면서 실재라고 여기는 것은 벽 위에 그친 그림자일 뿐이다. (중략) 그것은 실재의 그림자이지만, 그것보다 훨씬 더 실재적인 거의 그림자이다. (중략) 좀더 실재적이고 좀 덜 실재적인 것 사이의 구분, 상위 세계와 하위 세계의 구분이 있을 뿐이다. 이제 죄수들 중의 한 사람인 철학자가 족쇄를 끊고 고개를 돌려 처음으로 동굴의 벽에 그림자를 던지는 진정한 사물과 그림자를 드리우게 만드는 태양을 보게 되었다고 하자. 그는 이 눈부심에 현혹되지 않을까? 그는 곧바로 자신이 지금 보고 있는 실재와 비교하여 일상의 실재의 그림자들이 얼마나 불완전한가를 알아보지 않을까? 또한 언제나 불완전하고 혼동된 관념들과 일상적인 남녀의 행동에 비해 완전한 형상을 가진 덕과 정의, 그리고 용기를 보면서 철학자는 눈이 부실 것이다. 그 때 그의 열망은 얼마나 '더 높아'질 것인가. 그리고 만일 철학자가 다시 동굴로 돌아가 동료들에게 그들의 세계가 얼마나 초라하며, 또 그들이 이상적으로 여기는 것들이 얼마나 부적절한 것들인가를 설명해주려 하면, 그들은 오히려 그를 죽이려 들지 않을까? 이 비유가 소크라테스의 운명을 언급한 것임에 틀림없지만, 형상에 관한 암시는 더욱 보편적이고 심오한 의미를 갖는다. (p. 110-111)


플라톤의 <국가>는 묘하게도 권위적이고 위계적이며 평등주의적인 특징을 차례로 갖고 있다. 그것은 타고난 재능과 교육에 기초한 '자연적인' 귀족정치이다. 그리고 온건한 독재체제로서, 여기서는 '나라를 지키는 사람들'을 포함하여 누구든지 각자 본분을 알고 있다. 그것은 개인과 개인의 이익을 충족시키는 사회가 아니라 오히려 개인과 개인의 이익을 공통의 선에 종속시키는 사회이다. (중략) 좋은 사회에 관한 이와 같은 비민주적인 전망과, 선량하지만 괴벽스러운 '쇠파리'인 소크라테스의 거의 성자 같은 이미지를 조화시키기는 어려운 일이다. (중략) 우리는 마땅히 국가의 권위적이고 불평등적인 측면을 거부해야겠지만, 국가의 세계관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또한 절대적인 이데아라는 또 다른 세계를 믿는 극단적인 형이상학을 거부해야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상적인 덕의 추구와 얼마간 철학을 통해 덕을 기르는 중요성을 흘려버려서는 안 된다. (p. 112)



2010년 1월 11일 월요일

소크라테스

소크라테스는 사명을 가진 사람이었으며, 그가 항상 말했듯이 그의 가장 중요한 사명은 '자신의 영혼을 구원하는 것'이었지만 동시에 정치적 사명 또한 갖고 있었다. 그의 사명에는 민주주의에 대한 반대도 포함되어 있었지만, 그는 통치의 '전문가'가 아닌 사람들에 의해 통치되는 모든 형태의 정부에도 똑같이 반대하였다. 플라톤에 따르면, 소크라테스는 적어도 완전한 국가, 즉 철학자들에 의해 통치되는 '공화국'에 대한 이상을 마음 속에 그리고 있었다.(p. 94)


소크라테스는 아주 특별한 덕(virtue)개념이 핵심인 이론을 옹호하였다. 덕은 한 개인에게 가장 좋은 것이며, 덕 중에서 첫째가는 것은 철학적이거나 지적인 덕이다. (중략) 철학의 첫번째 덕은 철학을 하도록 요구하는 것이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또한 '자신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하여' 자신의 생을 포기했다고 주장하였다. (p. 98)


'자신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하여' 자신의 생을 포기했다고 주장했다. 이는 '이기적인 것' (그 자신의 이익,영혼의 이익,을 추구하기 위한 것)이었을까? 아니면 한 사람의 영혼의 궁극적인 덕을 위한 행동(죽는 것)이었을까?라는 질문이 남는다.


이기적인 것 / 그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기 위한 것은 무엇일까? 한 사람의 영혼의 궁극적인 덕을 위한 행동 /죽는 것 은 무엇일까?


이기적인 것 / 영혼의 궁극적인 덕을 위한 행동 :: 마음과 행동의 차이로 생각하면 될까? 또 이 말은 무슨 말일까? '내 영혼을 정갈하게 간직하기 위해서' 라는 말과 '지금 순간 죽는게 최선'이라는 말, 목적과 수단의 차이 정도로 생각하면 될까?


소크라테스 철학의 실질적인 세부사항에 관해 (그는) 별로 언급하지 않은 것은 이상하게 보일 것이다. 재차 말하자면, 그 이유는 그가 자신의 철학에 대한 주장을 거의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우리의 영혼을 구제하는 일이고, 좋은 영혼의 표지는 덕이며, 인생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지식, 즉 지혜를 얻는 일이라고 가르쳤다. 그렇지만 그는 덕은 가르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실제로 그는 거의 자신의 학생들의 '마음을 움직이려고'하지 않았다. 그는 영혼의 불멸을 믿었을 뿐만 아니라 영혼의 재생도 믿었다. (중략) 자신의 무지와 더을 계속해서 강조하였음에도 그의 철학을 통틀어서 수정처럼 분명한 명제 하나는 덕은 곧 지식이라는 것이었다. (p. 100)


그래서 (100P)에서 언급한 것처럼, '지혜는 어떤 것에 대해서도 많이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엄격히 깨닫는데서부터 시작'한다고 말한다. 이를 개달으면, 사람들은 '앎'을 얻는 행위를 통해서 스스로의 영혼을 구원할 수 있다고 말한다


소크라테스는 우선 '정의'를 구하고 그런 다음 모든 정의를 사실상 거부한다. 하지만 소크라테스에게 '정의'란 단지 (정의, 덕, 용기 같은) 단어들이 어떻게 쓰이는가 하는 사전적 의미만을 뜻하지는 않는다. 그는 정의, 덕, 용기 같은 것을 그것의 가장 순수한 형태 속에서 추구하였다. 그의 변증법/엄격한 대화법을 통해 모든 부적절한 정의를 제거하고서 남은 것이 진실한 것이라고 하였던 것 같다. (중략) (소크라테스는) 인간의 통상적인 경험 너머에 있는 이데아를 믿었던 것 같다. 이런 이데아가 한 사람의 영혼의 가치를 결정한다. 우리의 영혼이 우리가 태어날 때부터 이러한 이데아를 안다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이 이데아는 단지 '우리 안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직 현명한 사람들인 철학자들만이 이해할 수 있는 이데아의 세계에 속한다. (중략) (이러한 방법과 방법의 의의는) 그 이전의 고대 그리스 철학까지, 즉 항상 변화하고 단지 겉으로 드러나 보이는 세계 너머에 변하지 않는 세계, 다시 말해 이데아의 세계가 존재한다는 믿음과 희망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소크라테스는 스스로 답을 찾으라고 강조하였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는다. 단지 무지하다는 것을 스스로 알아야 한다고 말했다. 플라톤이 전하는 소크라테스의 모습에서 주목해야 할 부분은 이래서 '그의 말'의 뜻이 아니라, 그의 '행위'의 뜻일테다. 즉 말하는 방법에 대해, 왜 그렇게 말하는지에 대해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철학자를 지금의 학문적 철학자로 생각할 필요는 없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철학자들은 굳건한 의미의 '지식인'과 같은 사람들로 비춰질 뿐이다. 재수없다는 생각만 들 뿐이다. 철학자는 철학이라는 말의 옛 뜻에서 알 수 있듯 그대로 '지혜를 사랑하는' 스스로 알려고, 깨치려고 노력하는 사람 정도로 생각하면 된다. 사람답게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 그 노력의 방법은 '지혜'로워지는 사람으로 생각하면 될 것 같다. 지금의 '글'과 '논리', '증거'에 갇혀, 갇힌 동네에 정보의 양만 늘리는 자칭 지식인과는 다르다. 삶의 자세의 차이일 뿐이긴 하지만, 이 차이는 꽤 큰 것 같다.


http://club.filltong.net/selfgraphy/21944


2007년 8월 10일 ... 원제 A Short History Of Philosophy (1996). 세상의 모든 철학 .... 세계질서에 대한 탐구-고대 철학 '축(軸)의 시기'와 철학의 기원 / 그리스의 ...


2009년 12월 28일 월요일

헬라스의 지리적 환경과 기질의 형성




헬라스적 사유가 연원하게 된 지리적, 역사적, 사회적, 경제적 배경을 검토하는 일이 헬라스 인들의 사유 형성 과정을 이해하기 위한 전제가 될 수 있다. 고대 헬라스 철학사가로 널리 알려진 거스리는 철학자들의 사색이 '기질, 체험, 앞의 철학들'에서 영향을 받은 산물이라는 점을 지적한 바 있다.

헬라스적 사유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세계 질서와 명료성, 그리고 지적인 것에 대한 열정은 어디에서 비롯되었을까?

"한 민족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적 조건이 그들의 기질 형성과 사상적 조건을 규정한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주장이다"

한 사물을 다른 사물과 대비해서 그 윤곽을 두드러지게 보여주는 조각 작품이라든가 건축물들 그리고 회화에서 나타나는, 어두운 구석이 배제되고 있는 그들의 시각과 밝은 색조들, 이 모든 것들은 헬라스라는 특유의 환경 조건이 만들어낸 부산물일 것이다. 여름날 구름 한 점 없는 대기 가운데 강렬하게 내리쬐는 햇볕, 지중해의 햇빛은 겨울에조차 그 어떤 나라보다도 맑고, 투명하고, 강렬하다. 그 빛 속에서 헬라스인들은 직관적으로 이 세상의 '존재자들'을 보았던 것이다. 그것들은 바다, 태양, 하늘, 땅이라는 자연(physis) 가운데 둘러싸여 있었다. 그것들이 바로 물, 불, 공기, 흙이다. 그래서 헬라스인들은 그것들을 만물을 구성하는 아르케로서의 요소로 상정했던 것이다.

헬라스인들의 사고방식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왜 그들이 헬라스 본토와 펠로폰네소스 반도에 고립되어 머물지 않고 지중해 전 지역을 장악하려는 노력을 끊임없이 경주했는지를 물어야만 한다. 이와 더불어 외부로 향하는 헬라스인들의 노력 가운데에서 그들의 문화와 문명이 싹텄다는 사실을 염두해두어야 한다. 그들이 처한 환경적 조건은 그들의 경제적, 종교적 사고를 규정해주었으며, 나아가 그 밖의 다른 많은 역사적 사실들과도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P20-22 <김재홍, 그리스 사유의 기원, 살림>에서 발췌 및 재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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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헬라스의 역사

고대 헬라스의 역사

초기의 토착민을 중심으로 하는 헬라딕 문명에 뒤이어 상무(오히려 尙 굳셀 武)적 특징을 가지는 미뉘아 인들의 침입이 있었고, 기원전 12세기 혹은 11세기경에 뮈케네 문명이 도리아인의 침입으로 완전히 파괴된 후, 기원전 1100-900년 경에 암흑시대가 도래하였다. 기원전 900-725년경에는 기하학적 문양의 시기가 있었고, 기원전 725-650년 사이에는 본격적인 오리엔트화의 시기가 이어졌다. 기원전 650-500년 경에는 알카익기 (상고시대)가, 기원전 500-330년경에는 헬라스의 황금시대라는 고전기가, 기원전 330-67년 사이에는 헬레니즘의 시기가, 기원전 67년경부터 기원후 323년 사이에는 헬라스-로마 문명 시기가 차례로 전개되었다.

<김재홍, 그리스 사유의 기원 가운데>